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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세운 개국의 역사와 불행의 역사 같이 한 10월

기사입력 2021-11-1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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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開天節)
10월3일은 단군 할아버지가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여 나라를 세우고 즉위한 날로 국조이시며 우리민족의 시조이신 단군 왕검이라고 불린다. 

기원전 2333년 단군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 고조선을 처음 세우고, 모든 사람은 서로 돕고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홍익인간의 가르침을 건국이념으로 하였다. 

단군 할아버지의 전통을 이어 받은 우리민족을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배달의 단일만족이라고도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뜻 깊고 의미가 큰 국경일이다. 그러나 개천절에 대한 인식의 체감온도는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 너무나 아쉽다. 우선 정부의 인식이 문제인 것 같다. 광복절을 비롯한 다른 국경일은 대통령이 참석을 하여 경축을 하는데 개천절만은 국무총리가 참석을 하고 있으며, 지난 3일의 행사 역시 김부겸 국무총리가 참석을 했다. 

우리 이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 중에 개국시조의 의미를 두고 있는 나라는 소수라 하지만 우리민족은 단군의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분명하며, 홍익인간이라는 훌륭한 가르침은 고대 문명국가의 반열에서 세계 으뜸이라 자부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려면 민족의 시조에 대한 예의와 범절, 국민들의 인식이 똑 바로서야 한다. 자기민족과 나라의 개국시조에 대한 정신이 박해지면 타의 민족으로부터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시대의 변천과 종교적 이념에 따라 민족과 씨족의 시조는 물론 조상에 대한 예우의 정신이 퇴색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하지만 이 나라 이 국토위에 살면서 우리민족 스스로가 자기 부정을 하는 모순을 보여서는 안 된다. 격조 있는 나라와 품격 있는 국민의 위상을 높이려면 지도자들의 사고부터 달라야 하고, 자기네들의 국가관과 역사에 대한 대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한글날
한글하면 우선 세종대왕을 떠올리게 된다. 세종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셋째아들로 할아버지 이성계가 조선국 태조임금이 되자 아버지 이방원은 개국의 일등공신이면서도 과격∙과욕한 성격과 권력욕으로 인해 둘째 방과에게 세자책봉에서 밀려나 방과가 1938년 조선 2대 정종 임금으로 등극을 하였으나 동생 방원의 세력이 두려워 방원에게 권력을 넘기게 되니 제3대 태종 임금이며, 세종의 아버지이시다. 

태종이 1400년 즉위하여 1412년에 세종을 충령대군으로 진봉이 되고, 1418년 맏형인 양녕대군이 폐 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이 되어 같은 해 8월 아버지 태종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즉위를 하니 그의 나이 22세였으며, 조선의 제4대 임금이시다. 세종은 많은 학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집현전을 확장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옛 제도개선을 연구∙검토하며 정치와 행정의 체계 확립에 치중을 하였고, 경제와 사회, 문화, 학문, 종교, 의약, 농사 등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넓은 폭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각종 저서들을 출간하도록 지침서를 마련하였으며, 활자를 만드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활자 판짜기를 개량하여 인쇄 능률을 높이기도 하였다. 

한자 중심의 생활로는 음과 발음의 혼동으로 백성들의 생활에 불편함이 빈번하자 충령대군 시절부터 문자의 제정에 뜻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1443년 우리말, 우리글을 만들기 시작하여 말과 글이 일치하는 언문 28자를 직접 지었다고 한다. 

1446년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뜻이라는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한글날'이며, 처음에는 '가갸날'이라 했다고 하며, 올해로 575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이 세계 으뜸이나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 흠이라고도 한다. 세종대왕은 그 외에도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고, 측우기와 측 수표를 등을 발명하였고, 민주적 방식의 여론조사를 실시, 조선팔도 백성들을 상대로 공법(貢法)을 비롯하여 많은 제도에 대하여 가부를 묻기도 하여 민주적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10월 유신과 10.26.
1961년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육군소장 박정희는 황폐화하고 낙후된 조국을 일으켜 보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국가재건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국민의 인권은 다소 유보를 시키더라도 국민의 정신개혁과 경제개발에 역점을 두면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다음, 군의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고 한 대국민 약속이 정치적 욕망으로 자기가 약속을 스스로 하고 스스로 깨는 역사적 사건이 반복 되었다. 

첫 번째는 전역을 하여 민정에 참여 대통령이 되고 제3공화국을 이룩하면서 재선이 되었다. 두 번째는 본인이 만든 헌법을 개정 하여 딱 한 번만 더하여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3선의 모순을 남겼다. 그러나 권력의 생식은 가지면 더 큰 것으로 가지고 싶고, 더 오랜 세월 공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마련이다. 박정희는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위의 세종대왕과 같은 역사의 평가를 받는 대통령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1972년 10월17일 저녁 무렵 군인들이 서울 거리를 점령을 한 다음 저녁 7시 1.국회해산과 정치활동중지, 일부 헌법의 효력을 중지한다. 2.정지된 헌법의 기능은 비상 국무회의가 권한을 가진다. 3.평화통일을 위한 헌법을 국민투표로 1개월 이내에 결정한다. 4.개정된 헌법이 확정되면 연말까지 헌정질서를 정상화한다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유신헌법을 만들어 임기 7년의 8대 대통령이며, 4번째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면서 세 번째로 자기 약속을 자기가 깨는 역사적 모순이 발동한 것이다.

이것이 제4공화국의 유신정부다. 1975년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이 되면서 정세는 급변하게 되었으나 2년 후 이철승이 중도 통합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바뀌면서 유신체제가 안정세로 돌아서더니 다시 2년 후 1979년 민주회복과 선명야당의 기치아래 이철승의 신민당 대표 체제는 무너지고 김영삼 총재 체제로 출발을 하자 유신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을 문제삼아 김영삼을 국회에서 국회의원직에서 제거하는 제명처리를 하여 의원직을 물리적으로 상실하게 만든 것이 화근이 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유신철폐 운동을 시작으로 서울과 전국으로 확산이 되자, 권력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암투가 충돌하게 된 것이다.

권력의 실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 경호실장의 무모한 권력 행세에 불만을 품고 대통령과의 회식 만찬장에서 김재규의 반란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시해한 사건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이며, 철벽보다 더 두꺼운 권력도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도둑을 피하면 강도를 만나게 된다고 그로 인하여 전두환의 신군군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남양주신문 (ny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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